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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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쓴 수필을 모아놓은 책. 내 생각에 책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미덕인 '얇음'에 충실한 책이다.

작가 사상?의 정수만을 모아둔심지어 한 챕터는 '불안'에서 그대로 가져다;; 책. 동물원에 가거나, 공항에 가거나, 혼자서 식사를 하거나, 스팸문자조차 오지 않은 조용한 일요일 오후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는;;;, 따위의 일상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숙고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쏠로의 찌질함을 예술로 승화시킨 독신남이라는 수필을 여기에 옮겨볼까.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 없이 식사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함께 로맨틱해질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 더 로맨틱한 사람은 없다. 정신을 팔 일이나 친구도 없어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사랑의 본질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전화기가 옴짝달싹도 안 했던 주말, 매끼 통조림을 따서 식사를 하고 귀에 거슬릴 뿐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BBC해설자의 목소리-케냐 영양의 짝짓기 습관을 설명하고 있다-를 들으며 주말을 보낸 뒤에야 우리는 왜 플라톤이 사랑이 없는 인간은 팔다리가 반뿐인 생물과 같다고 말했는지(<<향연Symposium>>, 기원전 416년) 이해를 할 수 있다.
 그런 버려진 순간에 피어오르는 백일몽은 도저히 성숙한 것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성숙하다는 말에서 이상화나 로맨틱한 방만의 위험에 대한 경계심을 연상한다면 말이다. 에든버러로 가는 기차에서 내가 배정받은 자리 맞은 편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회사 보고서 같은 것을 읽으며 네모난 종이 팩에 든 사과 주스를 빨았다. 기차는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풍경(바싹 마른 들판, 공장의 파편)에 관심이 있는 척했지만, 내 신경은 내내 그 천사 같은 여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 창백한 피부, 푸르스름한 잿빛 눈, 코에 잔뜩 모인 주근깨, 줄무늬가 있는 세일러복 상의. 상의에는 작지만 분명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점심 때 먹던 마카로니에서 튄 것인지도 모른다. 맨체스터를 지난 뒤 줄리엣은 회사 보고서를 치우더니 요리책을 꺼냈다. <<중동의 음식>>.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집중했다는 표시였다. 속을 넣은 가지. 또 팔라펠, 타불레, 그리고 구루코처럼 보이는 것. 마지막 요리는 시금치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는 구불구불하고 단단해 보이는 필체로 메모를 했다.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뭐 사랑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기질에 따라서는 반한 상태, 병, 착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고조된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차가 뉴캐슬을 지날 무렵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벚나무가 줄지어 있는 거리의 집, 그곳에서 보내는 일요일 저녁을 생각했다. 그녀는 내 옆에 머리를 뉘고, 나는 손으로 그녀의 밤색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있겠지.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그녀가 만든 중동의 이런저런 요리를 소화시키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영원히, 또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세상에서 내 자리를 갖게 되었다는 충만감을 맛볼 것이다.
 이런 순간들이 독신남의 생활에 구두점을 찍지만, 겉으로는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다. 에든버러로 가는 기차나 점심시간을 맞아 샌드위치를 사려고 서있는 줄이나 공항 대합실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어떤 얼굴만 보아도 그런 백일몽에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서글픈 일이지만, 한 쌍의 남녀라는 제도를 이루는 데는 필수적인 요소다. 여자들은 홀로 있는 남자들의 절망에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충성과 이타심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로맨스라는 면에서 잘나가는 유형의 남자들을 의심할 만한 이유도 되겠다. 그런 남자들은 넘치는 매력 때문에 내가 겪었던 이런 희비극적 과정을 알지 못한다. 말 한마디 붙여볼 기회도 주지 않고, 사과 주스 팩과 내 머릿속의 결혼 계획만 뒤에 남겨놓은 채 다음 역에서 내려버린 여자 때문에 며칠씩 마음 아파하는 그 과정을.

"기차가 뉴캐슬을 지날 무렵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장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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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립식 2010.07.12 22:25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글을 잘 쓰면 '사실 알고보면 병신같지만 정말 멋있다.' 알랭드보통읽어주갓어.

    • Joyh 2010.07.13 22:46 신고 address edit & del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어요...

      http://www.ted.com/talks/alain_de_botton_a_kinder_gentler_philosophy_of_success.html
      도보시오

  2. luba 2010.07.13 00: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앗ㅎ 이거 읽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주인공 성격이랑 이 아저씨 본인 성격이랑 꽤나 비슷하다는 생각 했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그건 거의 자전적 소설이었던 듯

    • Joyh 2010.07.13 22:52 신고 address edit & del

      그 책도 읽기 대기열에 추가해야겠군
      대기열은 점점 길어지는데;;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