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장통, 전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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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에서 발간하는 크로스로드라는 웹진이 있다. 거기에 연재되던 Darwin`s lens라는 글들을 묶어서 출판한 책이 오래된 연장통이다.

역시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쓴 책이라 그런지 문장들이 재미있고 감칠맛이 느껴진다. 번역과는 다르다... 번역과는!

책 편집에 있어서 영어 이름이나 주석은 작고 빨간 글씨로 달아 놓은 것이 멋있어 보였다나도 써먹어야지

p.36 우리의 마음은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들을 잘 풀게끔 진화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농경 사회나 현대 산업 사회에서도 반드시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우리의 현대적인 두개골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 사람들이 피운 모닥불에서 나는 불빛을 암컷이 내는 교미 신호로 오해하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우리의 마음은 진화 역사에서 처음으로 접하는 생소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가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p.45 둘째, 잘하면 대박, 못하면 쪽박이라는 남성의 처지는 여러 가지 위험한 일에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심리를 진화시켰다. 가만있으면 망하는 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위험할지언정 엄청난 지위나 자원을 확보할 수도 있는 일이라면 일단 저질러 보자는 것이다.


p.47 셋째, 여성의 번식 성공도는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워 내느냐에 많이 의존하므로 여성은 아이를 돌보거나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를 꾸려 나가는 일에 남성보다 더 능하다. 실제로 여성들은 타인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으로부터 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 더 잘 읽어 낸다. 발달심리학자 사이먼 배런 코헨Simon Baron-Cohen과 그 동료들은 태어난 지 단 하루 된 아기들에게 여자 얼굴 사진과 움직이는 모빌을 동시에 보여 준 다음 어느 쪽을 더 오래 쳐다보는지 측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아기들은 얼굴 사진을 더 오래 쳐다보았지만 남자 아기들은 모빌을 더 오래 쳐다보았다. 남자 아기들이 사람보다 사물에 관심을 쏟게끔 가부장제가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단 24시간 안에 남자 아기들을 세뇌시킨 가부장적 요인이 산부인과 병원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 전중환님의 여유와 지적 매력 우왕ㅋ굳ㅋ


p.65 그러나 과연 제대로 '설명'이 된 것일까? 집단 간의 차이야말로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를 '문화'라는 자율적 실체로 새로이 명명하고서 이내 손을 놓아 버린다면, 대상에 대한 이름표 붙이기를 대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 이거슨 창조론 비판에도 써먹을 수 있겠다.


p.76 여성들 앞이라고 남성이 아무 물건이나 마구 사 대는 것은 아니다. "비단 옷 입고 밤길 가기"라는 속담이 있듯이, 아무리 비싼 상품이라 해도 상품의 성격상 여성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종류라면 굳이 과소비를 할 까닭이 없다. 그리스케비셔스 팀은 두루마리 휴지 같은 화장실 용품, 두통약 같은 가정상비약, 침대 머리맡에 두는 자명종 시계, 변기 세척기 같은 실내 위생용품처럼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소비 품목에 돈을 쓸 의향을 마찬가지 방법으로 조사했다. 예측한 대로 눈에 띄지 않는 소비 품목에서는 연애 정서에 빠진 남성들이 보통 남성들과 비교해서 더 많은 돈을 쓰지 않았다. 변기나 주방이 막혔을 때 쓰는 뚫어뻥에는 왜 초고가 명품 브랜드가 존재하지 않는지 이제 깨달았을 것이다.

  • 아하!


p.87 반면에 수렵 활동에 관련된 쇼핑 행동은 다음과 같다. 

- 작은 것들을 여럿 사기보다는 오디오나 컴퓨터처럼 큰 것을 하나 사러 갈 때 기분이 더 좋다. 

- 큰 걸 사러 갈 때는 친구의 도움을 받는다. 

- 원하는 물건을 산 다음에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 

- 낯선 쇼핑 센터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계속 확인한다.

 예측대로 이런 항목들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더 긍정적으로 답했다.

  • 다윈의 렌즈로 분석한 현상 중에 가장 공감가는 부분!


p.123 하지만 사바나는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이 필요로 했던 거의 모든 요건들을 구비하고 있다. 첫째, 동식물이 주로 지상으로부터 2미터 이내에 집중하므로 먹을 것이 많다. 둘째, 나무그늘 밑에서 비바람과 햇볕을 피할 뿐만 아니라 맹수가 나타나면 나무 위로 기어오를 수 있다. 셋째, 시야가 탁 트여서 맹수나 악한이 혹시 다가오고 있지 않나 살피기 좋다. 넷째, 지형지물들의 고도가 다양하므로 높은 곳에 올라서서 길을 찾기 쉽다아이들이 틈만 나면 부모에게 안아 달라고 조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사바나 이론은 학습이나 후천적 경험이 전혀 없이도 현대인이 사바나를 다른 서식처 유형들보다 선호하리라고 예측한다.

  • 어쩐지 높은 곳만 보면 자꾸 올라가고 싶더라니...


p.192 세 번째 증거는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도덕성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다.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의 특정 부위가 손상된 환자는 IQ나 일상적인 지식의 축적량 등으로 측정되는 인지 능력은 멀쩡하나 심각한 정서 결핍을 겪으며, 이로 인해 도덕 판단에서도 문제를 노출한다. 예컨대 "네 아버지의 뺨을 때려라." 같은 명령에 일반인들은 바로 울컥해 하지만, 이러한 환자들은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정상적인 지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번번이 사기를 치며, 남의 물건을 훔치고, 처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등 매정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다.

  • 명맛을 풍기는 그들의 정체는 나쁜 놈들이 아니라 단지 불쌍한 전전두엽 피질 손상 환자일 수도 있겠구나.


종교는 피할 수 없는 부대비용 中
p.219 인지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Pascal Boyer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약간만 낯설고 이상한 것에 가장 관심이 가고 더 잘 기억한다. 반면에 시시하도록 정상적인 것이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거나 전파하지 못한다. 단단한 벽돌은 따분하다. 수다 떠는 벽돌은 흥미롭다. 곁눈질하며 시들어 가는 벽돌은 대체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아방가르드한 요즘 세상에서는 수다 떠는 벽돌보다 곁눈질하며 시들어 가는 벽돌이 대세임.

화성남자 금성여자차분하게 읽어보진 않았지만보다 재미있는 책 같은데 앞으로 진화심리학 대중서는 그만 쓰신다고 하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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