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매뉴얼이군. 형식은 QnA. 다양한 인생 고민과 거기에 대한 답들로 엮여있는데, 이거 자문자답도 섞여 있는거 아냐? 는 의심은 뒤로하고 화장실에서만 틈틈이 읽어 조금 오래 걸렸다.
QnA보다는 중간중간 들어있는 에세이들이 더 재미있다. 하나 옮겨 본다.
0. 관계에서 사람을 정말 환장하게 만드는 게, 자기 혼자 자긴 피해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거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학벌, 재산,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사례 하나 보자.
1. 몇년 전 김종빈 검찰총장이 퇴임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전쟁을 내전이고 통일전쟁이라고 규정했던 강정구 교수를 검찰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수사하려 하자 당시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불구속 수사하라는 지휘권을 행사한 것을 두고, 김종빈 검찰총장은 검찰 독립 훼손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퇴임을 한다. 그때 이런 말을 했다.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 자신이 사퇴하는 것이 가장 원만한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검찰은 명예와 자부심 먹고 산다고. 에이 거짓말. 밥 먹고 살면서. '먹고 산다'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직업을 의미하기도 하니 그리 이해해도, 거짓말. 월급 받아, 먹고 살면서. 이 국보법 유령의 재출현을 보며 남들은 인권의 수호와 사상의 자유를 담론하고 또 한편에선 구국의 결단 같은 피 뚝뚝흐르는 거 막 선언해 버리고 그러는 사이, 당시 난 그 말 한마디가 사건 내내 우스웠다.
명예와 자부심을 먹고 산다, 이거지. 왜 유독 검찰은 명예와 자부심이란 걸 별도로 복용해줘야 하는 걸까. 피로 회복 자양 강장을 위해서라면 '현대인의 필수 아미노산으로 각광받고 있는 타우린 함량을 최근 1000mg에서 2000mg으로 두 배 보강하여 효능을 한층 높인" 우리의 박카스가 있지 않던가. 영진 구론산도 있고.
검찰총장의 이 '명예& 자부심 검찰 필수 섭취론'에 이의 제기했던 검사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걸로 보아 그 상시 음용 주장이 검찰 내부에선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는가 본데, 밥만으론 해소할 수 없다는 그 신비의 공복감, 과연 그 정체가 뭘까.
2. 검찰은 그 개개인의 학벌과 능력으로 보아 다른 일을 했다면 훨씬 높은 급여와 사회적 대우를 받았을 텐데도, 공공의 질서와 안녕이란 대의를 위해 그 업을 택했고 그래서 그 보상의 부족분을 명예와 자부심으로 알아서 메워내며 묵묵히 일하는 조직이다, 그런 자기희생의 절절한 사연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하소연인 건가. 그럼 그건 신세 한탄인데. 그리고 그런 건 임금 인상 위한 단체 협상으로 해결할 일인데. 총장 퇴임사는 그렇다면 검찰의 노조 결성을 사표로써 촉구하는 비밀 지령이었을까.....
아니면, 검찰 직업의 특성상 한번 봐달라는 온갖 종류의 상납 제안이 존재하나 그 모든 유혹을 오로지 명예와 자부심만으로 뿌리치고 있으며 또 형사 범죄를 상대한느 만큼 위해에 대한 공포가 상존함에도 또 한 번 명예와 자부심만으로 그 모든 난관을 힘겹게 극복하고 있다는, 그런 척박한 제반 근무 환경에 대한 토로였을까. 그렇담 그만큼 검찰 해먹기 어렵다는 탄식 아닌가. 글쎄, 나름의 애로 없는 직업 없겠다만, 이런 고충 처리는 주무장관인 법무부장관을 통해 국무회의에 건의하거나 정 자신의 직업이 버거우면 가까운 지인들과 전직을 논의할 일이었을 게고.....
그도 아니면, 다른 사법연수생들은 변호사나 판사로 개인의 영달을 좇을 때 오로지 명예와 자부심 하나 보고 법조인으로서는 궂은일이라 할 수 있는 검사가 된 것에 대한 후회, 그 선택에 대한 회한에 대해 우리에겐 명예와 자부심이 있지 않느냐는 대부인들끼리의 자기위안적 독백이었던건가. 그거라면 자신의 진로 선택이 어떤 고귀하고 품격 있는 기준에 의해 결정됐는지를 몰라주는 국민들이 섭섭하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는데, 글쎄 그거라면 원래 자기들이 좋아서 선택한 거 누굴 원망해......
혹여 이런 거였던 걸까, 검찰이 됐다는 건 중고 시절 모든 시험 전쟁을 승리로 치러내고 살아남아 사법고시라는 대한민국 최고, 최후의 시험까지 급제한 당대의 엘리트들이니 자금어대(紫金魚袋) 하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치켜세워주고 기운을 북돋워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대우해주고 그렇게 국민들이 그들을 명예와 자부심 느끼도록 대해줘야 더욱 힘을 내서 일 잘할 수 있는 조직이다, 그런 대국민 호소인가. 그럼 그건 응석이 아니던가.....
또는, 검찰은 정의로운 인재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스스로 다 알아서 판단하고 처리할 줄 아는데 아무리 주무부서의 장관이고 법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권한이 명시되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총장님이 절대로 안 된다고 못 박은 사안인데도 우리를 무시하고 그 명예와 자부심이 손상되게 간섭하고 지랄리야, 씨바, 그런 들이박는 항변인가. 그렇담 이건 상관에 대한 협박이자 그 권위 인정 못 하겠으니 입법, 사법, 행정 말고 검찰도 분리해 4부 체제로 가자는 독립 선언이고 말이다.
검찰은 명예와 자부심을 먹고 사는데, 그런데 그런 명예와 자부심을 다쳤다고, 그렇게 자기들은 권력에 의한 피해자라는 이 사고방식에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을 특별한 예외적 존재로 상정하는 뿌리 깊은 엘리트 의식이 깔려 있다. 검찰은 검찰 이외의 다른 대다수 직업들은 별로 명예스럽지 않고 자부심도 없지만 대우 좋고 돈 많이 줘서 억지로 계속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우, 유치해서 정말.
3. 하여 나는 대한민국 검찰을 보며 자신 있게 주장한다. 지성은 학벌 재산 지위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책 전체 세계관을 요약하자면 "니 삶을 니가 결정할 수 있도록 장악하고 그러기 위해서 선택에 따르는 비용은 감내하고 뭘 하면 행복할지 졸라 찾아서 스타일 좋게 살자!" 정도?
접어둔 글만 읽어도 느낌이 오겠지만, 문장에서 쉼표, 아주 남발; 하신다. 박민규 글에서 가끔 등장하는 테크닉. 구어처럼 들리면서 라임이 살아나는 데, 이거 중독성 있겠다. 졸업하기 직전 겨우겨우 이수한 대학국어, 담당 교수님께서는 아주 싫어 하셨다;;
그나저나 일러스트가 마음에 안든다. 책의 내용 이해도를 오히려 떨어트리는 왜 들어 갔는지 알 수 없는 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