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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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pid man's report of what a clever man says can never be accurate, because he unconciously translates what he hears into something he can understand.
- Bertrand Russell
이말이 이렇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독서는 또 없었다. 그래도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감히 몇 자 적어볼까;

둘이 우연히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는 아주아주 통속적인 줄거리를 철학 오타쿠;;의 자세로 디비 파는 것이 알랭 드 보통 소설의 매력. 남녀사이에 오가는 사소한 상호작용에서 이렇게 예민하게 숙고를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 이것이 훌륭한 작가적 감수성이구나!라고 감탄한다. 그보다 훨씬 강렬한 경험이 벌어져도 무뎌진 내 안테나는 노이즈만 수신하다가 언뜻언뜻 그림비슷한 얼룩이 떠오르는 고장난 테레비...

이상화

13.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 p.24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9. 이것에 대해서 무슨 변명이 가능할까? 모든 부모가, 장군이,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남의 속을 뒤집어놓기 전에 하는 낡은 말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 p.102

19. 존 스튜어트 밀의 호소는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는데, 그 원리를 개인적 영역에 적용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개인관계에 적용되는 순간, 밀의 비전은 슬프게도 그 호소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는 것 같다. 사랑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리고 껍질만 남은 결혼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p. 107

21. 나와 클로이의 관계가 공포정치 수준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아마 우리가 사랑과 자유주의 사이의 선택에서 다른 관계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하물며 사랑의 정치인들[레닌, 폴 포트, 로베스피에르]에게서는 더욱더 찾아보기 어려운 재료를 넣어서 반죽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국가든 남녀든 그 재료만 있다면[그것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편협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재료는 다름 아닌 유머 감각이다.


사랑을 말하기

22.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의미론적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갑자기 나는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p. 133

==> 무라카미 하루키 vs 알랭 드 보통   0:1


친밀성

우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모험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편집증적인 수다쟁이들, 고요가 배신을 낳을까봐["그/그녀가 이 침묵 속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대화를 중단하기를 꺼리는 수다쟁이들이 아니었다. -p. 150


마음의 동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가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녀의 몸을 스쳐가는 모든 변화, 그녀의 얼굴에 그려지는 선들, 월요일의 클로이와 금요일의 클로이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관념은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p. 183


사랑의 교훈

5. 성숙한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성숙한 사랑의 철학은 거의 모든 면에서 미성숙한 사랑보다 바람직하며, 그 특징은 각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매저키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 [어쩌면 이래서 욕망이 무엇인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고통 없는 상태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미성숙한 사랑은 [나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기는 하지만] 이상화와 실망 사이의 혼란스러운 비틀거림이며, 환희나 행복의 감정이 익사나 섬뜩한 구토의 인상과 결합되어 있는 불안정한 상태이며, 마침내 답을 찾았다는 느낌이 이렇게 헤맨 적이 없다는 느낌과 공존하는 상태이다. -p. 275


아무튼 무릎을 치다가, 가슴이 아프다가, 웃다가 하면서 재미나게 읽다보면 무려 교훈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이~ 뭐가 되었든 사랑 좀 줘"라고 외치고 있는 나;


요즘 날이 더워선가 계속 몽매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커피를 복용하면 인지력이 조금 돌아왔다가 자고 일어나면 또 몽매 속이다. "킥"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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